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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식과 교회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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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목사와 가난한 목수 /신성남

 

기독교는 가난을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을 통해 본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 보면, '부가 축복'이라 거나 또는 '부를 추구하라'는 식의 내용은 전혀 없슴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부자들은 천국에 가기 힘들다는 말씀이지요.

더구나 예수님 자신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무소유로 사셨다고 보아야 하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고생하시며 사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성도에게 물질적인 복이 그리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라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능력의 예수님께서 풍족하게 부자로 사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른다고 서원한 목회자들 중에 상당수가 구약의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면서 정작 '예수님의 가난한 삶'만은 결코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십일조는 좋으나 십자가는 싫다 
 
한국교회의 복잡한 문제 중심에는 바로 이런 일부 귀족 목회자들의 배도적이며 물욕적인 행실을 그냥 방치하거나 적당히 눈감아 주는 무분별한 관용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가장 엄격해야 할 직분자들에 대한 윤리 잣대가 썪은 옥수수 자루보다 더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이 시대에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실천해야 할 직분의 사람들이 신도들의 눈을 속이며 은밀하게 부를 채우고 있습니다.   

목회의 길은 주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길이 분명하건만 이들은 그런 고난을 기피합니다. 천국도 좋고, 명예도 좋고, 그리고 돈도 좋지만, 고난만은 싫다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십일조는 좋은데, 고생스러운 십자가는 싫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돈이 좋으면 사업을 할 것이지 왜 교회에 와서 순진한 신도들을 속일까요. 결국 이들이 목사가 된 동기가 매우 불순했거나, 아니면 중도에 가롯 유다처럼 크 게 변절했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목사의 사역이 한 주일 내내 매우 힘든 것은 필자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직을 이용하여 적당히 위선을 부리고 요령을 피운다면 짝퉁 목사처럼 편하고 탄탄한 직업이 세상에 또 얼마나 더 있을까요. 귀찮은 잡일은 부목사나 다른 교역자들에게 대충 떠맡기고, 평일에는 성경 연구하는 척 유유자적 딴청 피우다가, 설교는 여기저기에서 짜깁기 표절해서 합성하고, 그 다음은 주일날 목소리 깔고 적당히 무게를 잡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요즘은 공예배 시간에 하는 기도마저 미리 적어서 읽는 목회자도 있다고 하니 참 목사하기 편한 세상입니다. 교인들이 사전에 작성된 기도문을 읽으며 기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오히려 좋은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연구와 기도를 생활화하고 설교를 전문으로 하는 유급 목회자가 그리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질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직업 가수가 무대에서 가사를 손에 들고 노래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아마 그 무대가 고별 무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어떤 목사님들은 왜 이리도 소통이 안 되는지 정말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혹시 이런 지적들이 지나친 혹평으로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사역이 힘들다고 말이 많지만, 사실 세상에 만만하고 쉬운 직업이 어디 있습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물론, 비정규직 근로자들이나 시장 구석의 노점상 할머니들도 웬만한 목사들보다는 더욱 진하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주변에 있는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의 사는 모양을 한번 보십시요. 그들에게서 거룩한 직분자다운 검소함과 경건을 느끼십니까.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억 대의 연봉, 고가의 부동산, 고급차, 자녀 해외 유학, 집회를 핑계로 한 잦은 해외 여행, 과도한 유흥비, 그리고 사치한 소비 생활 등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지요.  
 
최근 언론에 보도된 일부 목사들과 그 가족들의 기만적인 호화 생활을 구태여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현실은 목회자들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미자립 교회와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 사이의 빈부 차이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가족들 생계마저 염려할 정도인데, 평생 목회만 했다는 다른 목회자는 수 십억 원의 재산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이 정상일까요.     
 
우선 바른 목회자라면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 안 되지요. 목사님들이 걸핏하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성경을 인용하여 헌금 독려를 하시며 성도들의 주머니는 수시로 털면서, 막상 자신들의 주머니에는 왜 그리 재물을 채우려 애쓰십니까.  
 
물론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그 자체가 '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유하게 사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그리 녹녹치 않고, 설사 그렇게 부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 재물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 청지기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그런데 귀족 목사님들은 유독 자기 재산만은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교회 공금이 아닌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전심으로 이웃을 돕는 것을 자주 보십니까. 만일 그랬다면 결코 현재처럼 부유하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언제나 교회 돈이나 성도들의 것으로 생색을 낼 뿐입니다.   
 
성직자가 부유하면 불행한 사회  
 
어느 목회자가 진정으로 교인들과 이웃을 사랑하며 돕는다면 어떻게 돈을 많이 모을 틈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친인척이나 교회 주변에 도와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없을까요. 이런 면에서 필자는 한 가지 사실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목사는 십중팔구 사이비이거나 목회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누릴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긴다면 그게 종의 모습입니까. 만일 그런 것이 목회라면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목사직이 귀하고 소중한 이유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종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니지요. 성경의 기록대로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 같이 살았습니다. 
 
중세 교회 형편이 요즘 일부 중대형 교회와 아주 비슷했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은 가난했는데 소위 성직자라는 사람들과 교회는 돈이 넘쳤습니다. 합동신학원 초대 원장이셨던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셨습니다. " 감독들의 사택은 궁전과 같이 우뚝 솟아 있는데 동리에 가득 찬 것은 학고방 집들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중세 시대의 현상입니다. 그들은 평민들이요 교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부패해서 주의 일하는 거룩한 자들이라고 성직자라 불리며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그런 중세 교회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요.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을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의 문제'입니다. 특히 교회 직분 을 사실상 계급화하여 부당한 교권과 금권의 단맛에 빠져 있는 귀족 목사님들은 이런 왜곡에 있어서 아주 프로 선수입니다.       
 
그 덕분에 '한국교회는 자정 능력을 잃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금 한국교회처럼 헌금 종류가 많고, 공금 횡령이 많고, 뇌물 수수가 많고, 무더기 세습이 많고, 성추행이 많고, 그리고 목회자가 많은 교회가 있습니까. 영국 교회 전체 목사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목회자들이 한국에서는 해마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소위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사회는 매우 불행한 사회입니다. 거룩한 성직이 타락하여 먹고 살만한 ‘인기 직업’이 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는 한 때 장성한 남자의 반 이상이 라마교 승려인 황당한 시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가 부패하는 책임은 모든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중세 시대처럼 자격 없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에서 배도자로 변절하여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고 십자가의 도를 대적하는데, 교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생활고로 힘든 교인들의 주머니를 짜서 걷은 헌금으로 목사가 부를 누린다면 누가 그런 목사를 존중하겠습니까. 수 십년 간 목회해서 대형 교회를 만들어 놓고 결국은 거액의 교회 돈을 횡령하거나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한다면 누가 그를 거룩한 직분자로 보겠습니까.  
 
하여튼 목사로서 고액 연봉을 받거나 자기 재산을 숨기는 자는 무조건 경계하십시요. 또한 목사만이 안수 기도할 수 있다거나 목사만이 축복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뚜쟁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조심하십시요. 예수님 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대리인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귀족 목회가 말하지 않는 것 
 
한국교회 귀족 목사들이 결코 말하지 않거나 실천하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난 한 삶'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 많은 신분 중에서 하필이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는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왕이면 요즘 귀족 목사들처럼 편하게 살지 않으시고 도리어 가난하고 불편하게 사셨는지를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부가 복음인가요. 돈이 복음입니까. 출세가 복음입니까. 아니면 무병장수가 복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따르는 무리들에게 부지런히 돈을 바치라고 한 적이 있던가요. 예수님이 신도들의 헌금으로 거액의 연봉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급여를 나누어 주시던가요.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큰 교회당 건물을 많이 세우라고 하셨던가요. 또는 사역을 핑계로 교회 돈을 받아 해외 여행 자주하며 흥청망청 돌아 다니라고 했나요. 아니면 부지런히 외부 집회에 다니며 본봉 외에 추가로 강사비를 듬뿍 챙겨 먹으라고 하셨던가요. 그리고 대를 이어 그 철밥통 담임목사직을 자식에게 물려주라고 하셨나요.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뱃살이 부풀 정도로 '부유한 목사'들이 정색을 하고 자신은 '가난한 목수'의 제자라고 합니다.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실제로는 가난한 이들을 거의 돌보지 않는 이 철면피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게다가 어떤 정신 나간 교인 중에는 이런 부자 목사에 대해 "우리 목사님은 큰 인물이 되실 주의 종이니 더욱 떠 받들어 모셔야 된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아니 종이면 다 그냥 종이지, 큰 종님이 따로 계십니까. 그리고 저게 정말 '종의 모습'입니까. 세상에 어느 간 큰 종놈이 감히 주인의 자녀들인 교인들 앞에서 저토록 사치와 교만을 떨며 삽니까.  
 
성경 어디에서 요즘처럼 방자하고 배부른 직분자들을 보셨는지요. 거룩한 공교회를 통채로 맹신 집단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는데 스스로 그 분의 제자라는 자들이 교인들의 상전 노릇을 하며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목회는 커녕 교인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일 귀족 목사들의 주장처럼 정말 '헌금이 진정으로 복 받는 비결'이라면 아마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많이 하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이 그런 비슷한 말씀이라도 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사도들이 자원하는 연보를 강조한 것은 어려운 형제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지 결코 직분자들의 치부를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목사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을 크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바치면 복이 있다'고 헛소리를 합니다. 기독교인의로서 '공의'를 위해 애쓰는 모습은 강아지 턱수염 만큼이나 보기 힘들고, 오로지 돈에만 눈독을 들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유능한 목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 입술만 유능하고 변절한 목사'가 너무 많은 데에 있습니다. 교회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건물만 크고 변질된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귀족 목사들은 작당하여 배운 알량한 '목회 기술'을 펼치며 부와 성공을 미끼로 많은 신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천년 전 이 땅에 섬기러 오셨던 그 가난한 목수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이름을 팔아 장사할 뿐입니다. 물론 가난한 교인들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돈이 나올 만한 부유한 교인들만 크게 보입니다.   
 
이들은 경건과 위선을 동일시하는 영적 사기꾼들입니다. 이런 종교 상인들이 무서운 이유는 적어도 겉 보기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인 척 위선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장술에 일반 신도들이 쉽게 넘어가는 것이 큰 비극입니다. 중대형 교회에 이런 위선자들이 적지 않지만 그 교회 교인들은 오히려 그런 목사를 천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 삶에서는 전혀 경건하지 않은 군상들이 강단에서는 아주 거룩하고 고상한 척 생쇼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이유는 사실 순수한 목회자들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이런 잡상인들 때문입니다. 학력을 속이고, 논문을 속이고, 경력을 속이고, 재산을 속이고, 추행을 속이고, 사역을 속이고, 인격마저 속이고, 그리고 아예 인생 전체가 사기인 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이란 자들이 상전이 되고, 성직을 맡은 자들이 부자가 되는 교회는 슬픈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은혜 시대를 사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사회적 신분이나 세속적 성취 따위가 성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억울한 종이 되든, 무고한 죄수가 되든, 또는 권세있는 총리가 되든 세류와 풍파에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성결을 지키며 겸손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 현혹되지 말고, 늘 ‘진리가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정상적인 목회자 역시 사람이니 간혹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언제든지 너그럽게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용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선의를 오용해서 그 부실함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지금 성도들이 목사님들에게 바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무소유로 살거나 또는 무슨 수도자같이 고결하게 살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금 횡령, 뇌물, 사치, 성추행, 그리고 교회 세습처럼 남 부끄러운 사고나 치지 마시고 그저 보편적으로 성실한 '보통 교인' 수준 만큼이라도 되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샬롬! 

신성남<도전 받는 목사왕국> pdf파일, 321쪽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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