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믿는 기독교가 이런 건가요?
계속해서 터지는 목사들의 성추문,
정치적 선동을 보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기 너무 부끄러워요.
제가 믿는 기독교가 이런 건가요?
그런 얘기 들으면 정말 안타깝고..
속상하고 목회 40년 했는데..
교회가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는..
자괴감 같은 것들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사실 아름다운 게 변질되면 가장 추하거든요.
사람들이 교회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뭔가 다른 삶이죠.
거룩한 삶, 맑고 깨끗한 삶, 헌신하는 사삶.
이런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데..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하고..
목회자들의 성추문이라든지..
돈 문제라든지..
각종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걸 보면 너무나 속상하죠.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뭐냐면..
그분들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사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의 가능성이 있어요.
기독교가 원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인류의 첫 사람이 죄를 지어서..
정말 재수 없게 내게도 죄가 유전됐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누구든지 죄에 끌리는 본성이 있다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인에게 경고하시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창4:7 새번역)
인간 속에는 모두 다 죄의 욕망이 있어요.
욕망이라는 게 있거든요.
자기를 과도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그러나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그 통제가 잘 안 되는 사람들..
과도함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매슬로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있는데..
욕망의 다섯 단계를 얘기하거든요.
첫째가 생리적 욕구 같은 것들이 있어요.
목이 마르다든지 배가 고프다든지..
그 다음에는 안전의 욕구가 있어요.
좀 안전하게 살고 싶어..
세 번째는 뭐냐면 소속의 욕구
왕따 당하면 어렵잖아요.
자존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나를 좀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그 욕구의 단계들이 있는데..
그런 욕구를 뭉뚱그려서 얘기하자면..
인간을 괴롭히고 있는 가장 큰 욕구가 있다면..
하나는 성적 욕구같은 것들이 있어요.
넘어가기 쉬운 것이죠.
프로이트 같은 사람은..
쾌락의 욕구를 가지고 인간을 설명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죠.
또 하나는 권력의 욕구입니다.
나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부과하고..
그 사람이 나의 뜻대로 움직여줄 때..
인간이 느끼는 쾌락이 또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그런 쾌락의 욕구나 권력의 욕구를 조정할 수 있을 때가..
아름다운 삶이라고 볼 수 있죠.
종교 지도자들의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자기 욕망들을 많이 눌러놓고 지내요.
그러다 보니까 때때로..
위선적 자아를 내면에 형상할 때가 있어요.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산뜻하고 좋은 사람인데..
자기 속에 있는 폭력 성향이라든지..
자기 속에 있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인간의 모습 같은 것들을..
해소할 길이 없는데..
그러니까 아주 음성적으로 그걸 해소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바로 그런데서 빚어지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또 목회자들이 정말 경꼐해야 할 것이 뭐냐면..
교회에서 뭐 저 자신도 그럽니다만..
설교단에 서가지고 설교를 하잖아요.
말하는 사람이잖아요.
말은 권력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주로 말하고 다른 분들이 들을 때..
이게 권력으로 바뀌고..
또 교회라고 하는 구조 속에서는..
목사가 중요한 인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자칫하면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 것처럼 느낄 가능성이 있어요.
특별히 교회가 커지다 보면 그럴 수 있어요.
내 말에 응답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물질의 용량이 커질 때..
사람은 오판하게 돼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적 규모를 넘어서는 순간 그 규모가 그 사람을 규정해요.
그러면 반드시 일탈로 나갈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중요한 게 뭐냐? 자꾸 자기를 지우는 연습을 해야 해요.
목회자들이..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놀 때 눈 오고 그러면요.
제가 잘했던 장난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들고..
뒤로 걸어가면서.. 내 발자국을 지우는 거예요.
안 걸어간 척하고..
그런데 정말 목회자들이 평생 해야 할 게 뭐냐면..
커지려고 하는 자아를 자꾸 낮추는 연습을 해야 해요.
'나도 똑같은 사람이야'
'내가 이런 욕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을 누르고 살지 않으면 안 돼'
하는 걸 자꾸 느껴야 하고..
그러나 하여튼 그 경계선을 넘어가버려서..
일탈 행위를 하는 분들이 있고..
또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이죠.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배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에 없어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이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인데..
출애굽 사건이라는 건 뭐냐면..
지배와 피지배로 갈린 세상에서 신음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찾아오셔서..
자유인이 되어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시는 거거든요.
그런데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의도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 집어넣고 그들을 오도된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을 희생시킴으로..
자기가 산 분이 아니고..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고 하셨던 분이죠.
이게 십자가 부활 사건입니다.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리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마20:25 새번역)
"그래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지만 너희들은 그래선 안 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20:26 새번역)
"으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해"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이게 성경의 근본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세상 사람들 앞에 비춰지고 있는 기독교의 부정적인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오도된 기독교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길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을 이제 해봐야 하는데..
다른 거 없어요.
"교회 현실이 이러니까 나는 교회 떠날 거야"
그러지 마시고 희망을 여기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희망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제가 담임하고 있는 이 교회에 제 전임자인 목사님이 함석헌 선생님에게 많이 배우셨어요.
그런데 한번은 함 선생님이 성경공부 하는 중에 이렇게 얘기를 하셨답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함석헌 선생님이 강의장에 딱 들어오더니..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안병무 박사에게서 편지가 왔다고..
그러고 편지를 꺼내서 읽는 거예요.
그 편지의 내용은 뭐냐면..
"조국의 암담한 상황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뭐 이런 얘기를 하시다가..
"선생님 빛이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함 선생님이 그 대목에 이르렀을 때..
편지에서 눈을 떼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발로 마룻바닥을 쾅 구르면서..
마치 안병무 선생님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대요.
"안 선생! 당신 속에 빛이 있으면 빛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야"
나 그거 굉장히 인상 깊게 들었어요.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이 있어요.
어떤 희망? 객관적으로 희망이 있다고 하면 희망할 거예요?
희망 없다고 하면 절망할 겁니까?
내가 시작해야 해.
나로부터 시작해야 하거든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70년대에 제가 신학 대학에 다닐 때..
사실은 70년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겠지만..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는 젊은이들..
또 그것을 억누르려고 하는 정부와의 팽팽한 긴장..
이런 것들이 있을 때죠.
나도 젊은이답게 고민이 많았죠.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우리 조국에..
그런데 꿈을 꿨는데..
이건 꿈 얘기인데..
내가 우리 교수님에게 묻는 거예요.
"선생님 한 치 앞도 안 내다보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런데 그 교수님이 나를 바라보면서..
"멀리 내다보지 말고 앞이 안 보일 때면 한 걸음 앞만 성실하게 내딛으려고 해봐"
잠에서 깨서 얼른 노트에 적었어요.
그런데 따지고 보니까, 그게 내 인생이었어요.
암담할 때 길이 안 보일 때..
길이 안 보이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한 걸음 내딛을 자리는 언제나 있어!
그래서 한 걸음을 내딛고 나면 풍경이 달라져!
안 보이던 길이 보이기 시작해!
그렇게 한 걸음씩 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땅에서 절망하고 있는 신앙인들이..
"정말 교회는 다 썩었어"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걸음을 성실하게 내딛자"
내가 만들어내는 빛이 반딧불처럼 희미할망정..
그 반딧불들이 모이면 사람들 속에 꿈을 만들어내잖아요.
와 아름답다.
그 빛 하나는 희미하지만..
반딧불이 만들어내는 희망이 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죠.
나는 이게 그렇게 낙심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으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목사들의 정치적 선동 헷길리고 부끄러워요!
나는 이제 우리 신학생들이나 젊은 목회자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오도할 수 있어..
우리는 사람들을 오도하기 쉬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두려워하면서 끝없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오도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엉뚱한 길로..
오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을 존중하면 안 됩니다.
비판해야죠.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되죠.
그런데 아니라고만 말하지 말고..
우리가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를 모델로 만들어 내야 해요.
사람들이 그걸 볼 수 있어야 하죠.
슬픈 게 뭐냐면..
기독교 속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기독교 언론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정말 아름답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고..
또 잘못된 가르침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게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목사님이 하는 일이니까 다 옳겠죠!"
아니에요.
목사도 잘 못 저지를 수 있어요.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힐 수 있어요.
그래서 아까 얘기한대로..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람들을 신앙적 언어로 오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얘기했습니다.
가장 신성한 것이 변질되면 마성적으로 변한다.
성스러운 sacred한 것이 악령의 demonic하게 변하는 거예요.
우린 그 현실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오히려 적그리스도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해요.
글은 영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