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통로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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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통로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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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통로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행 2:42-47))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의 통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전하는 사람 자신이 복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는 전도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수많은 방송과 채널에서 수시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모든 교회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도 분주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양만큼 그리스도 십자가의 진리를 감동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전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복음의 통로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통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상식적인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결코 그 누구도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초대교회의 은혜스러운 모습과 부흥을 살펴봄으로서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힘썼습니다(행2:42)


본문은 초대교회의 전도의 시작을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부흥의 원인은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전하는 언어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성령이 역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사도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자신의 삶속에 적용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과 화목을 나누기 위한 자기 훈련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대교회 부흥의 시작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훈련이 전제되지 않은 복음 전도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기까지 복음을 전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다면 그 또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자신의 변화가 상대에게 보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자신들의 새로운 삶의 위해서 스스로를 훈련하는 일에 힘썼다는 것을 관심있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행2:43-46)


이렇게 스스로를 훈련시킨 초대교인들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실천하였습니다.
44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훈련받은 초대교인들에게 변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먼저 나타난 변화는 경제적인 자유함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상대적인 빈곤은 있습니다. 더 가진 자가 있으며 많이 부족한 자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부모의 유산상속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대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이 신앙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물질의 용도를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을 나누는 원칙이 양적으로 똑같은 분배는 아니었습니다. 필요라는 구체적인 용도를 위해서 나눔의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본다면 그것은 헌금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헌금이 필요에 따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결코 초대교회 성도들은 헌신하는 물질에 대해서 인색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헌신으로 누군가가 필요를 채운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두 번째 변화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고 함께 있는 생활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소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그 소중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경제 활동도 하고 취미 생활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해관계를 위해서 사교적인 인간관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변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였으며 함께 있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 힘써야 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함께 있기 위해서는 서로가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그 댓가를 지불했다는 것이 힘쓰고 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다른 어느 것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서로를 가장 소중한 가치의 대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들이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끝으로 초대교회의 변화는 모임의 내용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구체적으로 나누었습니다. 함께 헌신하여 음식을 나누었고 서로의 진실한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환경이나 어떠한 유혹이나 고난과도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생활의 특징을 “힘썼다”는 말로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보면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떤 헌신이나 열심을 나타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프렌시스 수도원의 원장과 제자들의 모습과 같은 삶이 보일 뿐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초대교회에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행2:47)


본문은 이러한 초대교회의 변화에 대해서 주변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말씀합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주변의 사람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들은 생활에 헐떡이며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를 바라보는 일이 그들에게 강력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변화의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단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데 것을 알고 더 놀랐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달라진 것입니다. 그들과 똑같은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삶의 가치로 추구하던 개인적인 취미와 쾌락이 떠나가고, 분노와 불평과 생활에 찌들었던 표정들이 기쁨과 가치와 헌신과 사랑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초데교회의 놀라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이 초대교회의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전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아름다운 복음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달변으로 복음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어떻게 복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복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행복함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함을 본다면 누가 그 복음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모임과 헌신에 기쁨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모임에 헌신에 부담스러운 고민을 하는 사람을 통해서 과연 복음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이며 의무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가진 자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복음의 능력을 생활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의 편견과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 앞에 다시 한번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여러분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모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통로이지 결코 우리가 복음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가 우리가 원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녀의 뜻이 다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순종하는 변화가 필요할 때입니다. 전도는 바로 여기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주님이 하셨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 우리가 열망하는 전도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겸손하게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변화를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복음의 통로가 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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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성호 목사

열린문교회 담임 (신앙상담 : 010-2604-2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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