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받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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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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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0~14)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기도 할 때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기도 응답을 체험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기보다는 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본문은 기도 응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과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기 원하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바른 기도를 깨닫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 바리새인의 기도가 있습니다(눅18:10-12)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새인에 대해서 혐오의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바리새인 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큰 욕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리새인들은 신앙적으로 그렇게 혐오스러운 사람들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1절과 12절에서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기도를 요약하면 감사와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탁월한 생활을 하는 것을 감사하는 내용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매우 혹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바리새인의 기도를 혹독하게 평가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생활을 원하지 않아서 그러실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도 굳이 도덕적인 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더 도덕적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은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성경에서 그들의 기도를 잘못된 기도의 모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실제적으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약 6,000명 정도의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우 율법적인 형식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본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혐오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지도층이었으며 그들의 신앙은 가장 모범적인 신앙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자신들의 도덕적인 완전함을 감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이라는 오만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그들의 차별의식이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는 도덕성이 중요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십니다. 순종은 겸손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순종이 인격적인 순종이 아닌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없었으며, 그들의 순종은 겸손이 아니라 특권을 과시하고 타인을 비판하는 오만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교만이라는 죄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가 아니라 율법과 형식에 치우친 종교적인 성격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기도였습니다. 올바른 기도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형식적인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주변에서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충고를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기도생활은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 생활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이렇게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었을까요? 그 착각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누구보다 도덕적이었으며 종교적인 기도생활에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철저한 기도 생활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공개적으로 홍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외면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세리의 기도가 있습니다(눅18:13)


두 번째로 당당한 바리새인의 기도와는 아주 다른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기도의 주인공은 바로 세리입니다. 세리는 로마 시대에 동족을 억압하여 징수한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문헌에 의하면 세리들은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여 그 일부를 착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리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그들을 분노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세리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면 그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도덕적 기준으로 볼 때 세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리와 같이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도덕성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리의 기도를 도덕적으로 본다면 스스로가 부도덕한 인간임을 자인하고 그 죄의 고통을 토설하는 내용입니다. 세리의 기도에는 감사도 헌신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용서에 대한 절박하고 애절한 내용만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세리가 하는 기도의 특징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시인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리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세리들은 종교생활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기도의 방식에 대한 깊은 지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세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넌센스였던 시대입니다. 세리는 감히 하나님을 찾을 자격조차 없는 버림받은 자들로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는 그러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통회하고 자복하는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진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형식적인 내용이라면 세리의 기도는 진실한 기도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셋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눅18:14)


주님은 이들의 기도에 대해서 14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면하시고 세리의 기도는 응답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의 이 기도에 대한 비유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기도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수단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응답받는 기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종교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한 종교적 관계였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격적인 관계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구약의 제사라는 형식을 빌리지 않고도 가장 인격적인 기도라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기도는 결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의 교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기도라는 대화를 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녀가 되어서 세리와 같이 진실한 기도를 할 때 바로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먼저 기도의 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종교적이고 자신의 욕망으로 왜곡된 기도를 버리고 진실로 인격적이고 겸손한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자녀들의 모든 필요와 요구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인격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는 기도 생활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이 진실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올바른 기도 생활을 함으로서, 그 생활이 영육간에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기도의 삶에서 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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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성호 목사

열린문교회 담임 (신앙상담 : 010-2604-2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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